"Loneliness as a widget" :: 고독감을 위젯처럼 달고 다니기 사람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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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인상에 대한 평은 거의 언제나 '차도녀'라는 것인데(안경 벗고 화장했을 때), '얘기해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 대화가 재밌다', '에너지가 있다', '열정적이다', '신념이 있다', '멋있다', 혹은 '알고보니 허당이네', '털털하네'라고 한다. 여자들한테나 남자들한테나 '유쾌하다', '같이 얘기하고 싶다'라는 평이 제일 좋다.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활기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실은 나는, 자기주장 강하고 배려가 없고 산만하고 투정부리고 부담스럽고 지말만 하고 실속없고 왠지 불편한 인간이지 않을까'라고 엄.청.나.게. 걱정을 한다. 걱정을 하면서도 토론수업을 할 때나 프로젝트를 할 때에는 활발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앞장서서 노력한다. 그래야 수업이든 프로젝트든 재미가 있어지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드세보일까봐 걱정을 한다. 그래서 나를 이쁘게 봐주는 언니, 오빠들한테 그런 마음을 털어 놓는데 그럼 또 깜짝 놀라면서 그런지 몰랐다고 토닥여 주는 손길에 잠시 위안을 받고는 한다. 대놓고 욕을 하거나 이런건 좀 고치라는 말을 들어보진 않았는데 굳이 나에게 악평을 함으로써 자기 이미지를 나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적당히 친절하게 대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ㅠㅠ).

 유치원 때부터 청소년기, 미술대학에 진학한 이후까지 '너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죽 들어왔다. 집중할 때 뿜어져 나오는 기가 남다르고 과묵하게 있다가 툭툭 치는 농담이 재치있다는 것이다(현재 이렇다는 게 아님). 어렸을 때라 이런 평을 듣고는 한동안 허세가 들렸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정말 그렇게 재능이 있고 왠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다. 물론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고 정말 노력하긴 했고 나름 성취했지만. 그런데 그렇게 홀로 노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딱히 혼자 있는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아니 좋아할 필요가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니꼴라 부리요는 ≪관계의 미학≫에서 예술가에게 강요되는 개인적인 주체성의 한계를 언급했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예술가가 은둔자이면서 혼자이기를 원하고 그가 이탈리아의 민족통일주의자와 같기를 꿈꾼다. "그는 항상 혼자서 글을 쓴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만 한다" 등등. 이런 에피날의 판화(어떤 것의 좋은 측면만을 보는 과장되고 전통적이며 순진한 시각을 의미)는 두 가지 구별되는 개념을 혼동하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날 아직도 유효한 공동체적 규칙들에 대한 예술가의 거부와 집단의 거부를 혼동하는 것이다.
/../ 쿠퍼Cooper에 의하면 광기는 한 사람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참여하는 관계적 구조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가 하나의 중심을 갖는다고 전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는 결코 혼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조르주 바타유). 누구도 혼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작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척 해야만 한다.

니꼴라 부리요, ≪관계의 미학≫ 중 개인적인 주체성의 한계

거의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예술가같다'라는 평을 받아온 나는 이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무진장 노력해오고 있다.(이제 그런 평 듣지 않는다. 공학이나 디자인 전공자로 보는데 따로 얘기를 좀 하면 '완전 예술가네'라고 한다. 이런건 괜찮음.) 뇌에 주름이 한꺼풀 잡히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주류 집단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생각에 언제나 너무 슬펐다. 적어도 '이들이 나를 배제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온 마음이 외로움으로 뒤덮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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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시대에 예술가는 지배층이었고 서구문명에서 중세까지 예술가의 이름은 전혀 중요치 않았으며 우리에게 알려진 20세기 이후의 예술가들은 사후가 아닌 생전에 명예와 부를 누렸다. 예술가가 유난히 고독하고 은둔 생활을 했던 것은 19세기~20세기 초의 매우 짧은 기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이 역시 서구 문화사에 국한된 얘기).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예술가' 혹은 '예술가 이미지'에 고독과 은둔을 강요함으로써 예술가를 지배 집단으로부터 유리된 비정상적 소수집단으로 정체화한다. 이에 따라 스스로를 예술가로 정체화한 사람들은 본래 그래야하는 정도보다 한참을 더한 고독감에 빠져 거기에 매몰되어 버리고는 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남들에게 무작정 신비롭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여지게 하고 싶어서 '예술가의 은둔'을 곧이곧대로 따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일종의 마케팅 컨셉이다(요즘 같이 자기 이미지를 팔고 남의 이미지를 사는 시대에는 마케팅 아닌 것이 없으니). 그 컨셉을 구사하고 싶다면 전략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지, 고독의 감정에 도취되면 안된다. 고흐의 고독과 불행은 빈민의 삶을 흉내내는 것이 쿨한 것으로 여겨졌던 당시의 요구에 부합하고자 시전(始展)한 예술가의 자기연출이었다. 요즘에는 다른 사업자들이 고흐가 연출해 놓은 이미지를 매입하여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의 한 요소로서 이용한다. 이 전략은 예술계에서는 이미 유행이 지날대로 지나서 고독의 '고'자만 꺼내도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데, 참 신기하게도 예술계 밖에서는 여전히 어느 정도는 먹힌다. 많은 사람들이 고흐를 좋아한다. '제품이 아닌 예술품이 되고자' 하는 프리미엄 스마트TV의 홍보 영상에는 고흐의 그림이 슬라이드쇼로 흐르고 그의 고독과 불행은 광고, 음악, 서적, 영화, 에어컨, 파우치, 냉장고 자석, 태블릿 배경화면, 스마트폰 케이스 등의 컨테이너에 담겨 인기리에 팔리는 콘텐츠가 된다. '평범'한 걸 선호하고 호쾌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고흐같이 우울하고 어두운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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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대체로 어둡고 우울해 보이는 사람을 피한다. 아주 당연하다. 어둡다는 것은 생기(生氣)가 없다는 것이므로 생을 추구하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어둠을 피하고자 하는 DNA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고흐는 왜 먹힐까? 이유는 고흐의 고독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네이버에서 '고독감'을 검색했더니 좋은 표현이 튀어나왔다. 
(이미지 출처: 작성자 검색 후 스크린샷)


고흐의 고독이 전략적 태도였을지언정 그의 고독에는 '비운의 천재', '죽어서 비싸게 팔리는 위대한 예술가'라는 권위가 있다. 사람들은 고흐의 고독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힘을 좋아한다. 고통이나 불행 역시 마찬가지다. 고통과 불행이 없는 사람은 아주 드무므로, 거기에 충분한 힘을 더하면 동질감과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호감을, 아니 그보다 더한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고흐처럼 천재도 아니고 비싸게 팔리기 위해 죽을 수도 없고, 죽어봤자 비싸게 팔리지도 않을 우리들의 고독에 어떻게 하면 힘을 실을 수 있을까?  

"고독감을 '고독력'으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고독감을 통제함으로써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심플하고 직관적인 해결책을 원한다. 


그러니까 위 내용을 "Loneliness as a widget", 즉 '고독을 위젯처럼 달고 다니기'라는 표현으로 일축해보자.


나는 고독감을 아는, 혹은 알고자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고독감을 마음이라는 화면에 위젯처럼 달아보자. 그러면 억지로 숨기거나 억누를 필요가 없다. 언제나 화면에 떠 있으면서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아도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위젯처럼 고독감을 다뤄보자.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즐거운 척을 하고 '연극이 끝난 뒤에 나의 고독에 접속'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고독력의 행사(行使)가 결코 '발산적 형태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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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래곤볼에서 오공과 친구들은 더욱 강해지기 위하여 신의 궁전에 오른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수련을 하며 움직임에 군더더기를 없애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氣)가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 공간의 특징은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것이다. 바깥 세상의 하루가 이곳에서는 1년이다. 바깥세상에서의 1분은 이곳의 6시간이다. /../ 또한 중력이 지구의 10배이고 공기도 1/3 밖에 없으며 일교차도 심해서 영상50도에서 영하40도까지 변화한다. 심지어 식량도 물과 쌀가루가 전부다. 보통 사람은 잠시도 버티기 힘들며 손오공조차도 한 달(=2시간) 밖에 못 견뎠다고 한다. /../ 베지터와 트랭크스가 수련을 하여 초사이어인의 한계를 넘은 파워를 얻는다. 그 다음에는 손오공과 손오반이 들어갔다가 나오고, 이후 셀 게임이 벌어질 때까지 7일 동안 베지터, 트랭크스, 피콜로 등이 수련했다.

출처: 정신과 시간의 방, 엔하위키 미러

우리가 머무는 고독의 공간과 상당히 유사하지 않은가? 이것을 고독력에 대입해보자. 고독감이 머무는 고독의 공간에서 해야할 일은 마음을 무심(無心)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 뒤에라야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을 제어하며 표출하는 고독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말이다.


오반이 비델에게 기(氣)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힘인데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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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내가 제안하는 고독감을 위젯처럼 달고 다님으로써 마음의 사용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신의 궁전에 올라야 한다. 신의 궁전은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고도이므로 그걸 타고 올라갈 힘과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덧글

  • 2014/06/20 03:4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6/20 12:5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6/20 13:2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6/20 13: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6/20 04:0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6/20 04:2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A3 2014/07/26 00:02 #

    고독감을 위젯처럼 달고 다닌다는 건 평소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신선했습니다.

    드래곤볼 이야기도 그저 만화로만 보고 지나갔던 것을
    고독력과 연관지어서 설명하니 한결 이해하기 쉬워지네요.

    이런 주제를 연결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이 생각하셨을지..! :D

  • 8sc 2014/07/26 01:20 #

    고독감을 달래고자 시전한 언어유희였는데 다른 사람에게도 신선함을 줄 수 있었다니 기쁩니다 ^^